며칠 전, 2002년 개봉한 영화 '디아워스'를 다시 봤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본 게 처음은 아니에요. 5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당시 니콜 키드먼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라는 사전 정보만을 가지고 이 영화를 접했더랬죠. 당시 괜찮은 영화를 찾는 저만의 기준이 바로 국내 외 각종 영화제의 수상작을 찾아보는 거였거든요. 아무래도 이미 관객과 심사위원들의 검증을 한차례 거친 작품들이기에, 작품성은 물론, 자신만의 철학이 확고한 영화들을 찾기에 이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죠. 나중에 알고 보니, '디아워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영화더군요. 마이클 커닝햄이 쓴 원작 소설 '디아워스'는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을 석권했고요, 제가 본 영화 '디아워스' 역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여우주연상'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했어요. 제 입장에선 거를 이유가 없는 작품이었던 거죠.
여담이지만, 이 영화 보기까지 많이 돌아왔어요. 디아'워'스 개봉 1년 전, 니콜 키드먼이 디아'더'스라는 작품에도 출연했었거든요. 호평도 많았지만, 이미 식스센스라는, 비슷한 반전을 가진 작품이 워낙 확고하게 자리 잡았을 때라 저에게는 식스센스2라는 인상을 남겼던 작품이기도 하죠. 어쨌든 개봉 시기도 비슷한 데다, 영화 스포를 극도로 싫어하다 보니, 줄거리도 피했던 제게 니콜 키드먼이 주연인데다, 비슷한 제목을 가진 두 영화는 너무 헷갈리기 쉬웠던 거죠. 지금 와서 돌아보면 참 바보 같았지만요.
줄거리 (스포 있음)
이 작품에는 세 곳의 각기 다른 시대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1941년, 영국 서섹스를 배경으로 한 첫 번째 주인공은 여러분도 한 번쯤 이름은 들어본 적 있는 작가죠.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입니다. 첫 등장부터 남편 레너드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편지를 남긴 채, 한발 한발 서서히 물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슬아슬하죠.
다시 1923년으로 돌아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 리치먼드의 교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작품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이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 고용인들을 비롯해 남편까지, 모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을 넘어 감시하고 있습니다.
1951년, 미국 L.A에는 <델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는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이라는 여인이 다정한 남편과, 유순하기만 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임신한 로라를 위해 출근 전, 직접 아들의 아침밥을 먹이고, 로라의 컨디션을 챙깁니다. 배려 같지만, 이들의 관계 역시 억지로 엮어놓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모두 은연중에 로라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죠. 로라 역시, 마찬가지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고,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남편의 생일을 맞아 아들 리처드에게 케이크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모습마저도 왜 이리 불안한 걸까요.
마지막 주인공은 2001년, 미국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출판 편집자, 클래리사(메릴 스트립)입니다. 그녀는 옛 애인 리처드(에드 해리스)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를 준비 중이죠. 하지만 정작 파티의 주인공인 리처드는 이 파티가 달갑지 않습니다. 이 파티가 마치 에이즈와 정신병을 가진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죠. 10년을 걸려 쓴 자전적 소설은 모두에게 어렵다는 평가만을 받고, 자신 역시, 실패한 작품으로 여기는 지금, 그는 어떻게든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누구보다 의연하고, 주체적 이어 보이는 클래리사를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부르며, 상처를 주죠. 하지만, 클래리사에게 이런 상황은 이미 익숙합니다. 그녀는 리처드를 달래 결국 파티에 참가하겠다는 답을 받아내죠.
세 주인공의 하루는 계속됩니다. 버지니아(니콜 키드먼)는 오후에 있을 언니의 방문을 기다리며 여전히 소설을 집필 중인데요, 모두가 그녀의 작품 활동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집필을 위한 그녀의 일과를 한낱 유희로 여깁니다. 버지니아의 요양 위해 일부러 리치몬드에 출판사까지 차린 남편 레너드지만, 버지니아의 고민과 감정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지는 못하죠. 버지니아는 단지 그녀를 지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양 구는 남편과, 이 모든 것들을 벗어나고 싶어 런던행 기차가 보이는 역으로 도망칩니다.
로라(줄리안 무어)는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지만, 케이크는 맘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그런 하루를 버티는 게 버겁기만 합니다.
그런 로라를 바라보는 아들 리처드의 시선 역시 불안한데요, 결국 로라는 그간 준비해뒀던 약을 챙겨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버림받는 것임을 직감한 아들을 뒤로 한 채, 호텔방을 찾아가죠. 자신을 혼자 둬달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그녀는 결국 죽음을 택하지 않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리처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의 생일파티를 무사히 마칩니다.
클래리사는 리처드로 인해 가라앉은 기분을 지우려 파티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마치, 이 파티를 위해 하루를 사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들떠 있고, 지나치게 열정 가득하죠. 하지만 애써 누르고 있던 그녀의 감정은, 리처드의 옛 애인인 루이스 워터스의 방문으로 새어 나오고 맙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자신을 추스른 채, 파티의 주인공인 리처드를 데리러 가죠. 그리고, 마침 죽음을 결심한 리처드의 추락을 눈앞에서 지켜봅니다. 결국 그녀는 파티 대신 장례식을 치르게 되죠.
버지니아(니콜 키드먼)는 단지 그녀를 지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양 구는 남편과, 이 모든 것들을 벗어나고 싶어 런던행 기차가 보이는 역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그곳까지 쫓아온 남편에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걸면서까지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 없음에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끝끝내 버지니아가 죽음을 선택한 건, 결국 그녀가 진정한 자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아들 리처드의 사망 소식을 들은 로라(줄리안 무어)는 클래리사(메릴 스트립)를 찾아옵니다. 그녀는 과거 둘째를 낳은 직후, 가족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책을 통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리처드의 감정을 읽었기에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삶을 찾았기에 그 선택에 후회는 없노라고 얘기합니다.
여전히 '인형의 집'이 회자되는 이유
작품 속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오직 하나입니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는, '나'라는 존재를 찾는 것.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라는 그늘을 벗어나, 나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죠. 하지만 그녀들의 근본적인 바람은 한편으론 한때의 치기처럼, 또 한 편으론 이기심의 발로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을 리처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결국 엄마 로라를 죽여버리죠. 단순히 미움이라는 감정이라기보단, 늘 자신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던 엄마의 존재, 그리고 부재를 어떻게든 지우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을 거라 봅니다. 끝내 자신은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버지니아와 같이 삶을 포기하는 방향을 택한 건 아닐까. 가족을 버리고 떠난 로라의 선택이 리처드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을지도 모르지만, 또 한 편으론 로라의 선택이 달랐더라도, 리처드의 삶의 결말은 같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린 리처드는 오히려 금세 떠나버릴 것만 같은 로라를 보며 더 불안해 보였거든요. 엄마의 껍데기만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건, 리처드의 삶에 또 다른 형태의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요.
세월이 가도, 자신의 삶과 자유를 찾기 위해 새장을 탈출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유효한 울림을 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간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키자는 많은 움직임을 통해 변화가 있어왔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느끼는 편견과 억압이 있기에, 누군가는 끊임없이 여성을 주체로 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겠죠.
평가 : 별 네 개
'쀼의 문화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록의 소중함] 영화 디태치먼트, 도망치지 않아주는 당신이 소중한 이유 (스포 있음) (0) | 2023.05.31 |
---|---|
[기록의 소중함] 영화 '드림', 누가 이 영화를 신파라고 했나. (뒤에 스포 있음) (0) | 2023.04.30 |
[기록의 소중함] 미친 감독의 귀환, '킬링 로맨스' 스포를 저지르기 전 '남자사용설명서'부터 돌아봅니다. (0) | 2023.04.28 |
[기록의 소중함]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feat 독서에도 왕도는 있나) (0) | 2023.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