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쀼의 문화 생활

[기록의 소중함]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feat 독서에도 왕도는 있나)

by 모두까기쀼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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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별 셋 반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수업 중 선생님이

‘상록수’라는 책을 읽은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시 선생님의 그 말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불과 며칠 전, 문학 시리즈에 끼어있던

그 책을 집어 읽은 기억이 있기도 했거니와,

당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던 내가

선생님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매 발표 기회가 찾아올 때면

선생님과 눈이 마주칠까 전전긍긍했던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망설이지 않고 번쩍 손을 들었다.

그 순간, 교실 안에서 손을 든 건,

나와 우리 반 반장,

단 둘 뿐이었다.

“오-“

그 순간 비록 내가 공부는 애매해도,

역시 또래보다는 성숙하고 수준 높다는

나름의 허영심에 빠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럼 상록수 주인공의 이름이 뭔지 알아?”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질문에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것과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작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데

당연히 주인공의 이름 따윈 알 리 없었다.

그나마도 한참이 지나 떠올린 건

야학을 운영하던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 뿐.

하지만 문제의 반장은 당당히 대답했다.

‘채영신이요.’

그 순간 갈리는 희비란…

지금 생각해 보면 자의적인 해석이었을 것 같지만,

당시 선생님의 눈빛에서 실망을 읽은 나는

그 뒤 다시는 먼저 발표라는 걸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날 내가 주인공의 이름을 얘기하지 못한 건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바로 칭찬 받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한

‘속독’이라는 덫이 있었다.

흔히 얘기하는 속독은

빠른 시간 내에 책의 내용을

머릿 속에 집어넣는 것을 의미하지만

내 경우엔 좀 달랐다.

어릴 적, 부모님은 생일선물 대신

책을 많이 사주셨다.

책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그런 내게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어른들은

오늘은 어떤 책을 읽었냐고 물었다.

몇 번 그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제목만 대고도 칭찬 받는 법을 익혔다.

그나마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억지로나마 책을 읽은 건 사실이었지만

자연스레 빠르게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고,

결국 책장을 넘기는 것에 의미를 두는 날들이 늘어갔다.

결국 속독이라는 버릇이 생긴 건

자의 반, 타의 반인 셈이었다.

문제는 그 버릇을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고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어도 머릿 속에 남지 않고,

그저 읽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에 급급하다.

속독의 가장 큰 문제를 얘기하자면

바로 내 생각이랄 게 없다는 거다.

책을 읽고, 곱씹고,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통해 내 주관을 쌓는

일련의 방법을 익히지 못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 얕은 깊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나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지라

아이디어가 필요하거나,

구성을 잡아야 하거나,

내 작업을 설명하거나,

혹은 작업 과정의 문제를 지적해야 하는 순간조차,

머리가 하얘지는 일이 잦다.

그리고 내가 놓친 포인트를

너무나도 쉽게 파악한 이들을 보며

자괴감에 빠지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사고하는 방법을 찾다 보니,

책을 읽으라는 조언을 듣고,

책은 읽는다고 했더니,

책을 읽고 생각하라는 조언을 들은 것이

이 책을 펼치게 된 계기였다.

 

 

 

사실 이동진이라는 평론가를 알게 된 건,

꽤 오래 전이었다.

 

당시 영화를 자주 보다 보니

글발 좋기로 이름이 난 그를 자연스레 알게 됐다.

그리고 남다른 그의 평론을 보고 흥미가 생겨

라디오를 챙겨 듣다가 그의 말발에 홀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까지 찾아듣기 시작했다.

 

덕분에 한 동안 끊었던 책도 다시 들었다.

구매만 하고선 덮어버린 총 균 쇠부터,

그가 추천해 준 책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소설집까지.

그에겐 막상 읽으면 재미 없는 책조차

흥미롭게 소개하는 남다른 재주와 더불어,

책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있었다.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저 사람처럼 제대로 책을 읽고,

흥미롭게 얘기하고 싶다는

일종의 욕망이었다.

그리고 살다 보니 또 한참,

그런 욕망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백수가 된 지금,

문득 다시 제대로 책을 읽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뒤지다

이 책을 만났다.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나를 다시 책에 관심 갖게 한 그 사람.

'이동진'이었다.

게다가 그토록 알고 싶던

그만의 독서법이라니,

확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라면,

내가 3n 년 간 놓치고 살았던

독서의 왕도를 알려주지 않을까’.

그렇게 약 3일에 걸쳐

이 책을 나눠 읽은 소감은,

역시는 역시다.

제목이 지독하게 길지만

책은 꽤나 술술 익힌다.

반나절이면 독파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재밌다.

1장에서는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해봄직한

여러 질문들에 대한 작가만의 시선을 던진다.

작가 본인이 생각하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어떤 방식의 독서를 해야 하는가’,

‘괜찮은 책을 고르는 방법’ 등

알고 싶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할 수 있다.

정답을 구하고자 읽은 책이 아닌데

꽤 괜찮은 해답을 제시한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 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이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각자 본인의 취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있어 보이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지적인 허영심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 본문 중 -

흥미롭지 않은가.

있어 보여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니.

사실 이동진 작가만의 관점과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은 이 밖에도 많다.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문학은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자꾸 쓰다 보면

특히 좋은 말일수록

먼지가 내려앉게 되어 있어요.

내가 정말 곡진하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은 워낙 감정적으로 강력하고도

유용한 말이기 때문에

상업적 이유를 포함해서

지나치게 과용되고 있죠.

심지어 114 전화 안내원조차 한때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시작하고는 했으니까요.

- 본문 중 -

2장은 씨네21 이다혜 기자와의

대담을 담았다.

 

1장에서 얘기한

책을 고르고, 읽고,

남기는 방법의 연장선상이다.

더불어 작가 이동진,

평론가 이동진의 삶에

책이 스며든 일련의 스토리를 담고 있으나,

그리 흥미롭지는 않다는 게 내 사견이다.

이다혜 기자가 끌어낸

작가 이동진의 인생 스토리가

그가 얘기하는 책과 영화만큼

극적이지는 않아서인 걸까,

아니면 같은 맥락에서 화자 이동진의

통찰력 있는 유머가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 때문인 걸까.

어쩌면 내가 '이동진의 빨간 책방' 속

김중혁 작가와의 티키타카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청취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작가 이동진’이 궁금한 이들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파트이리라.

 

더불어 누군가

이 책을 추천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그렇다.

여전히 이동진이라는 사람은 매력적이고,

그의 얘기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이동진이라는 사람을 좋아했던 이유가

이 책 곳곳에 숨어 있다.

이성적이지만 감성 가득하고,

때론 날카로움도 엿볼 수 있다.

일종의 자기개발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당히 논리적인 에세이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독서의 왕도까지는 얻지 못했지만

(하루 아침에

책 한 권으로 그걸 깨달을 수 있었으면,

지금껏 이리 살진 않겠지…),

이동진이라는 사람과,

그가 얘기하는

독서 철학을 엿보고 싶은 이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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